안개 속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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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힘을 합쳐 적에 맞서다

천군은 천정이 한 여자로 인해 온통 어지러워졌다는 말을 듣고 순간 까닭 모를 노기가 치솟아, 발을 한 번 내딛자 몸은 어느새 그 자리에 표연히 이르러 있었다.

"설아?" 그러나 아누를 본 순간 천군은 저도 모르게 놀라 외쳤다.

설아는 다름 아닌 아수라왕후의 본명이었다. 그해 천군은 그녀를 한 번 보고 마음을 빼앗겨,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눈에 밟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른바 얻지 못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더욱이 천정 황실은 여인에게 무정하기 이를 데 없어, 제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세월 앞에서는 시들기 마련이었고, 언제나 새사람의 웃음만 볼 뿐 옛사람의 눈물은 듣지 못했다. 그해 설아는 서슴없이 아수라왕의 품으로 달려갔고, 그로 인해 천군의 마음은 깊이 찔리고 말았다. 두 종족 사이의 끝없는 반목에도 이 일이 얼마간 얽혀 있었다.

아누의 그 얼굴은 설아와 판박이처럼 꼭 닮아 있었다.

"아니, 설아가 이런 나이일 리가 없다. 너는 설아의 딸이냐? 설아에게 딸이 있었단 말이냐?" 천군이 몸을 숙이며 손을 뻗어 아누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소이가 더욱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아 천군이 그녀에게 손끝조차 대지 못하게 했다.

천군은 노기가 일어 이번에는 성난 눈길로 소이를 쏘아보았다.

"보잘것없는 영지정 주제에 감히 본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느냐?" 천군이 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묵직한 법력이 실려, 아누를 꼭 끌어안고 있던 소이를 그대로 밀쳐 냈다. 소이는 튕겨져 나가 바닥에 쓰러지며 세차게 피를 한 모금 토해 냈다.

"소이…… 소이……" 천군이 소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깨달은 아누는 화들짝 놀라 몸을 날려 소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소이, 어서 도망쳐요.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말아요." 아누는 이리저리 살피며 소이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해 애가 탔고, 그 초조한 얼굴빛은 천군의 마음속 불만을 더욱 부채질했다.

사실 아누는 자신의 부모와 천군 사이에 있었던 그해의 일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미무림에서 자랐으니, 그런 케케묵은 옛일을 굳이 알려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녀도 몰랐고, 소이도 몰랐다. 아누의 눈에 천군은 그저 자신의 오라버니들을 죽인 원수일 뿐이었고, 소이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아누를 지키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천군이 아누를 해칠까 두려웠고, 더욱이 천군이 아누에게 손을 대는 것이 두려웠다.

"당신이 안 가면 저도 안 가요. 갈 거면 함께 가고, 죽을 거면 함께 죽어요." 소이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영지정 같으니, 네게 대체 무슨 재간이 있어 이 아수라 아가씨를 지켜 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천군은 언짢은 낯빛으로 등량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뭘 하는 것이냐? 진법을 다시 펼쳐라."

등량은 잠시 멍해졌다. 상대는 겨우 둘뿐인데,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라는 말인가? 게다가 그중 하나는 아수라족도 아닌데, 저 아수라 아가씨 한 사람을 상대로 진법을 다시 펼치라는 것인가?

설령 그녀에게 삼계를 압도하는 미모가 없었다 해도, 그저 힘없는 여인 하나일 뿐인데 어찌 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손을 쓰지 않느냐?" 천군의 노기가 더욱 거세지자 등량은 감히 거스르지 못하고 명을 내려 다시 진세를 펼치고, 입속으로 나직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고, 머릿속이 부풀어 터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본 소이는 소맷자락 속 건곤에서 거문고를 꺼내 자리를 잡고 앉아, 법력을 열 손가락 끝에 가득 실은 채 물 흐르듯 청아한 소리를 튕겨 냈다. 그는 어디까지나 모로가 친히 가르친 제자였으니, 아직 완전히 사람의 모습을 이루지 못한 영지정이라 해도 그 법력만은 결코 얕볼 수 없었다. 이 한 번의 방해로 과연 그 사악한 주문이 아누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게 줄어들었다.

"아누! 선수를 쳐요, 건곤비로 저 천병들을 상대해요." 머리가 쪼개질 듯한 통증이 겨우 조금 가라앉자마자, 아누의 귓가에 곧바로 소이가 일러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아누는 기를 끌어올려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뒤집으며, 건비를 손에서 놓아 등량의 이마를 향해 날렸다. 곤비 또한 오천 개의 분신으로 화하여 동시에 오천 천병들의 이마에 꽂혔다. 삽시간에 천병들의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일어나며 하나둘 쓰러졌고, 진세도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아누는 천병들의 목숨까지 앗지는 않았다. 그녀의 뜻은 소이를 구하는 데 있었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무정하게 자신의 세 오라버니를 죽였다고는 하나, 원한에는 원한을 지은 자가 따로 있는 법, 그들은 그저 명을 받들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목숨을 원치 않았으니, 그저 그들에게도 머리가 쪼개질 듯한 그 고통을 한번 맛보게 하는 것으로 족했다.

건곤비를 거두어들이고 가볍게 몸을 돌린 아누는 곧장 천군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천군은 순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이 계집아이는 뜻밖에도 매섭기 그지없었으니, 그 성정은 설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설아는 온화하고 부드러웠지, 이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가는 기백은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천군을 마주하고서도 조금의 두려운 기색조차 없었다.

천군은 넓은 소매를 한 번 휘둘러 건곤비의 첫 번째 좌우 협공을 떨쳐 냈다. 그때 다시 그의 귓가에 소이의 쟁쟁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수세를 공세로 바꾸어 마치 세찬 격류처럼 그 자리에 있던 천인들을 뒤흔들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귀를 틀어막고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이는 천군마저도 손가락을 짚어 나직이 정심주를 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곧이어 아누의 두 번째 공세가 소이의 거문고 소리를 타고 다시 천군의 얼굴을 향해 곧장 밀려들었다. 천군은 한창 주문을 외우던 참이라 마음을 나눌 겨를이 없었는데, 문득 두 자루 비수가 앞뒤로 잇달아 날아드는 것을 보고 다른 한 손을 급히 뻗어 막았다.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두터운 법력에 건비의 기세는 눌렸지만, 곤비는 건비를 넘어서며 뒤늦게 앞질러 왔다. 천군은 몸을 뒤로 젖혀 곤비의 일격을 피했으나, 소매는 곤비에 스쳐 한 줄기 칼자국이 나고 말았다. 겨우 발을 딛고 서자, 눈앞에는 아누가 칠채유광검을 손에 쥐고 그를 향해 찌를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뒤집어 아누의 검을 쳐 내려는 순간, 뜻밖에도 건곤비가 다시 좌우에서 그를 덮쳐 오니, 그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두 비수부터 쳐 내야 했다. 바로 그 틈을 타 칠채유광검이 아누의 팔찌를 가볍게 튕기는 맑은 소리가 울렸고, 그 자줏빛 이마의 꽃도 어느새 은은히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소이는 거문고 소리를 환음으로 바꾸어, 아누의 매혹술이 앞서 길을 열도록 이끌려 했다.

천군은 한창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싸우고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적을 너무 얕본 것이었으니, 이 두 어린것들이 힘을 합쳐 덤벼들어 자신을 이토록 이리저리 쫓기게 만들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때의 천군은 앞으로 자신이 무엇과 마주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아누는 하나는 소이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둘은 세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무리 마음이 여려도 이 순간만은 천군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였으니, 설령 천군을 죽인다 해도 자신과 소이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아수라족 또한 결코 멸망의 재앙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소이 역시 사정이 나을 것이 없었다. 그는 바깥세상의 일을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니, 오로지 미무림에서만 자라나 바깥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고, 오직 마음과 눈길이 온통 아누에게만 향해 있었다. 아누가 살면 그도 살고, 아누가 죽으면 그도 홀로 살아남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방금 천군의 눈빛에서 천군이 아누에게 품은 남다른 정을 읽어 냈으니, 이는 그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지니는 이 예민한 감각으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군의 뜻대로 되게 놔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누가 천군에게 모진 살수를 쓰려 하자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