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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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쁨에 겨워

두 대의 신벌편은 사실 자연에게는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그의 수행이 워낙 높았기에, 양혼단을 먹고 잠시 조식하고 나니 곧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그러나 천계에서는 겨우 한순간이 지났을 뿐인데 인간계에서는 어느덧 한 해하고도 남짓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자연이 다시 미무림을 찾았을 때는 이미 눈이 펑펑 내리는 계절이었다. 지난해 아누에게 작별을 고하러 왔을 때는 인간계가 아직 가을빛이었는데, 지금 미무림은 온통 은빛으로 뒤덮여 시냇물마저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마음이 다소 편치 않았다. 아누의 외출을 막아 놓고 그녀를 한 해 넘게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 것이었다.

천인과 아수라족은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으니, 인간계의 사계절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게다가 자연의 법력이 정묘하여, 하늘 가득 큰 눈이 내려도 그의 옷자락 하나 적시지 못했다. 길을 걸어오는 그의 자줏빛 도포 한 벌이 온통 은빛으로 뒤덮인 눈밭 위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런데 파랑새가 미처 울기도 전에, 아누가 집 안에서 뛰쳐나오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자연이 왔다! 자연이 왔어!" 아누의 목소리에는 짙은 기쁨이 묻어났고, 자줏빛 붉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에 자연도 저도 모르게 잠시 멍해졌다.

"천천히 오시오! 눈길이 미끄럽소." 아누가 넘어져도 다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은 그래도 그렇게 당부했다.

"파랑새가 울지도 않았는데 어찌 내가 온 줄 알았소?" 자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서둘러 걸음을 옮겨, 아누가 조금이라도 덜 뛰어오게 했다.

"날씨가 추우니까 파랑새가 게을러져서 둥지에 처박혀 나오려 하지 않는 거예요!" 아누가 손가락으로 나무 위의 새 둥지를 가리켰다.

"그 애도 참 가엾어요, 수행이 부족하니 이런 추운 날씨에는 그저 직무를 게을리할 수밖에 없나 봐요."

아누는 뛰어오면서도 이미 허리춤에서 자연이 준 옥패를 꺼내 들었다. "옥패가 방금 갑자기 따뜻해지길래 당신이 온 줄 알았어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이미 자연 앞에 다다라, 옥패를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자연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자기 손안에 감싸 쥐고는 슬며시 놀렸다. "때로는 그대도 그리 바보는 아니구려!"

그러고는 다시 애틋하게 손을 뻗어 아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방금 바보가 아니라고 해 놓고 또 바보짓을 하시는군, 어찌 술법으로 눈과 비를 막지 않으시오? 보시오, 머리도 옷도 다 젖었소." 그렇게 말하며 자연이 술법을 걸어 그녀를 말려 주려 했다.

"필요 없어요……" 자연의 뜻을 알아챈 아누가 얼른 말렸다.

"저는 범인도 아니니 감기에 걸릴 리도 없고, 눈비를 맞는 게 얼마나 상쾌한지 몰라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젖히고 빙그르르 돌며 눈송이가 얼굴 위로 떨어지게 두었다.

아누의 이 별난 취향을 바라보며 자연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늘 그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노라면 마치 자신이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진 천족의 대전하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 보통 사람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라?" 겨우 두 바퀴를 돌던 아누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추어 서서 의아한 얼굴로 자연을 바라보았다.

"방금 저더러 바보라고 하신 거죠?"

저 한 박자 늦은 반응을 보면 바보가 아니라고 누가 믿으랴?

자연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입으로는 감히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어린 소녀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저 이따금 좀 바보 같을 뿐이오……"

운주유악하고 천리 밖의 승패를 결정짓는 자신이, 지금은 한낱 어린 소녀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다니, 생각해 보면 스스로도 참 못난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이 소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그렇겠죠." 아누는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흔들어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내며 다시 말했다. "당신 앞에서 바보 안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고는 자연을 흘겨보며 다시 말했다. "게다가 두 군이 대치 중이라 정신을 딴 데 쓸 수 없다면서 미무림에서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고 나를 속였잖아요…… 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는데, 알고 보니 남 대신 채찍을 맞기로 작정하고 상처를 다스리느라 저를 지켜 줄 여력이 없었던 거잖아요……"

말하는 사이 아누의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렸고, 얼굴은 이미 눈에 젖어 있었지만 자연은 단번에 그녀의 눈물을 알아보았다.

"알고 있었소?" 자연은 마음속 가득 미안함이 밀려왔다. 자신의 선의의 거짓말이 이렇게 들통나 아누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몸은 이제 다 나으셨어요?"

아누는 자연의 손을 잡아끌며 위아래 좌우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얼마 전 넷째 오라버니가 저를 보러 와서 며칠 머물다 갔는데, 원래 말이 많은 분이라 해야 할 말이든 아니든 다 해 버려서, 그래서 당신이 남 대신 채찍을 맞은 일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당신 말을 새겨듣고, 이 한 해 넘도록 미무림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요."

아누가 그를 걱정하는 말을 듣자, 자연은 마치 양혼단을 여러 알 먹은 듯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지고 온갖 병이 다 나은 듯했다. 알고 보니 이 소녀는 그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나았소, 채찍 두 대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오." 자연이 아누를 위로하며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아 주려 했지만, 눈물과 눈이 뒤섞여 닦을수록 얼굴이 더 젖어 버렸다. 그는 순간 당황하여 술법을 걸어 아누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말려 주고 눈비의 침습도 막아 주었다.

"당신은 저한테 천 년의 수행을 건네주고도 채찍까지 맞았는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저 속이지 마세요."

"음! 속이지 않소, 안심하시오." 자연은 아누의 얼굴에 아직 눈물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손안에 손수건을 만들어 가만히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비의 방해가 없으니 확실히 눈물을 닦기가 한결 수월했다.

예전에 손수건을 건네도 마다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아누는 확실히 그와 한결 더 가까워진 듯했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속에도 그의 자리가 하나 생긴 것은 아닐까?

자연은 문득 마음속에서 위안이 되는 느낌이 일었다.

"정말 나는 괜찮으니 아누는 울지 마시오."

자연이 부드럽게 아누를 품에 안고 가만가만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달랬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누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 당신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녀는 아직 콧소리가 짙게 묻어 있었다.

아누의 그 말을 듣고 자연은 순간 멍해졌다. 마음은 기뻤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천족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어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들 모두 늘 저더러 천족 사람들과 멀리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만 잘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도 다 잘해 주고, 게다가 이렇게 총명해서,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당신 손에 들어가면 쉽게 풀려 버리는 것 같아요. 예전에 오라버니가 당신을 칭찬할 때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이제 당신을 알고 나니 비로소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정말로 알게 됐어요."

"저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바보였어요! 당신한테 요괴도 좋은 요괴 나쁜 요괴가 있다며 대의를 늘어놓았는데, 정작 당신은 마음속에 천하와 삼계 중생을 다 품고 모두를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저만 바보처럼 굴어서, 당신 마음속으로 저를 비웃고 있었겠죠!"

말하는 사이 아누는 울음을 그치고 웃으며 고개를 들어 자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천지의 새하얗고 맑은 빛을 비추어 더욱더 맑고 반짝였다.

"나는 그대를 비웃지 않았소." 자연이 다시 아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웃었다. "바보스럽긴 좀 바보스러워도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오, 예뻐하기에도 바쁜데 어찌 그대를 비웃겠소?"

"당신 저를 좋아해요?" 아누는 자연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고백을 듣고 다소 얼떨떨했지만 그렇게 뜻밖도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그토록 애지중지 살펴 주었으니, 그 애정은 이미 넘쳐흐르고 있었다. 다만 갑자기 그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들으니, 그녀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번에 영항이 사랑을 위해 용감하고 한결같았던 모습이 자연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영항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고백하며 여한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의 그 모습은 자연으로 하여금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과 아누, 두 종족의 오랜 원수 관계로 인해 앞길이 어둡고 불투명하여 본디 함부로 진심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영항에게 자극을 받아 마침내 그도 용감하게 한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설령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아누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온통 붉어져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신발 코끝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자에게서 이렇게 직접 사랑을 고백받은 것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이토록 훌륭한 남자였으니, 그녀의 마음은 이리저리 뒤흔들리고 사슴이 날뛰듯 두근거려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소의도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마음을 쏟아 왔지만, 그는 끝내 그 사랑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몽롱하게 그 마음을 받아들였을 뿐 이렇게 어색하고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늘 활달하고 씩씩하던 소녀가 갑자기 성격이 변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자연은 궁금한 듯 몸을 숙여 그녀를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도무지 피할 곳이 없어 얼굴이 더욱더 붉어질 때까지.

"아이참! 저리 가세요……" 자연이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자 다급해진 아누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밀어내려던 것뿐이었는데, 뜻밖에도 자연이 오히려 손을 뒤집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누의 그 반응만으로도,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태도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아누의 마음속에도 그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은 문득 지난번 아누가 영문도 모르게 자신을 따라 군영까지 왔던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 이미 이 소녀의 마음속에 사랑이 싹텄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는 그의 마음이 영람과 영항의 일에 쏠려 있어 한때 그녀의 그 소녀다운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뿐이었을지도……

아누의 마음속에도 자신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자연의 마음속에는 마치 경칩의 봄우레가 울린 듯 문득 봄기운이 싹트고 만물이 소생하며 생기가 넘쳐흐르는 듯했다.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살며시 열이 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느끼며, 자연의 마음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안과 만족이 차올랐다.

"그렇소. 자연은 아누를 마음에 두고 있소." 아누를 든든히 품에 안은 채, 자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매우 단호했다.

"당신……" 아누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힘껏 고개를 들어 자연을 바라보았지만, 뜻밖에도 자연이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을 하고 말았다. 이 입맞춤은 그와 동시에 아누가 이마의 꽃에 걸어 두었던 봉인도 풀어 버렸다.

아누는 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그만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렸고, 더욱더 부끄러워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켜 버려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은 굳이 숨기지 마시오." 자연이 부드럽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만히 그 자줏빛 고운 꽃송이를 어루만졌다.

"당신 이 바람둥이……" 아누의 눈동자가 자연의 손을 따라 데굴데굴 움직이더니, 마침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로 자연을 나무라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

잔뜩 성난 듯하면서도 수줍은 아누를 바라보며 자연은 절로 흥미로움을 느꼈다.

"이 천지간에 오직 아누만이 나를 바람둥이라 부르는구려."

"당신……" 아누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연을 흘겨보며 다시 말했다. "자연이 이렇게 능글맞은 사람이었을 줄이야?"

"이 바람둥이, 나한테서 좀 떨어져요……" 그녀는 힘껏 자연을 밀어냈다.

"당신…… 거기 서 있어요." 아누가 아무렇게나 자연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입을 삐죽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알겠소. 아누가 서라는 곳에 서겠소." 자연의 눈에는 아누의 온갖 말과 웃음이 그저 어린 소녀의 앙탈로만 보였다. 그녀 앞에서만은 그도 조금의 저항력도 없었으니, 어지러운 정사를 처리할 때의 그 냉정하고 침착한 모습과는 달리 그저 무조건 그녀에게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자연이 얌전히 그 자리에 서는 것을 보고서야 아누는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자연의 입맞춤 때문인지 아니면 이마의 꽃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이것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아버지 외의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입맞춤이었다. 소의는 그녀가 잠든 사이에만 몰래 입을 맞추었을 뿐이라 아누는 전혀 알지 못했으니, 그렇기에 이번의 입맞춤은 비록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웠어도 실로 그녀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자연의 눈에 들어오니, 말로 다 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 그는 저도 모르게 나직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