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 년의 수행
"아누! 아누!" 결계가 사라짐과 동시에 아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은 나직이 그녀를 불렀지만 목소리에 서린 근심과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아누를 일으켜 안고 그녀의 숨결을 살피다가, 저도 모르게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때 상수와 행아도 달려왔다.
"아누! 아누!" 숨이 실낱같은 아누의 모습을 보며 행아는 유달리 애가 탔다.
저만치서 상수는 한쪽에 떨어져 있는 옥패 하나를 알아보았다. 그 옥패가 그에게 얼마나 낯익은 물건이던가! 그가 자연을 따른 이래로 이 옥패는 자연이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었으니, 이미 자연과 한 몸처럼 되어, 마치 저울과 저울추처럼 늘 붙어 다니던 것이었다. 얼마 전 자연이 미무림에서 천정으로 돌아온 뒤로는 그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랫사람인 그로서는 감히 캐물을 수 없어 그저 이 일을 마음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대황자비마저 그에게 찾아와 물은 적이 있었지만 그 역시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도 바로 이 순간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상수는 이 일을 마음속으로 곰곰이 되짚어 보며 앞뒤 정황을 찬찬히 정리해 보았고, 오늘 자연의 행동거지까지 살펴보니 문득 깨달음이 왔다. 혹시 대전하께서 아누 공주를 마음에 두시어 몸에 지니고 다니시던 옥패를 그리운 이에게 내어 주신 것은 아닐까?
이 결론에 상수는 잠시 얼이 빠졌다. 이는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전하가 언제 누구를 마음에 둔 적이 있었던가? 황자비 마마조차도 대전하의 마음속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니, 남들은 몰라도 그만큼은 분명히 보아 왔다. 다만 아랫사람인 그가 어찌 감히 대전하의 일을 캐물을 수 있으랴, 마음속으로만 훤히 짐작할 뿐이었다. 왕비 마마는 천군의 사혼 덕분에 대전하와 부부의 연을 맺는 남다른 복을 누렸으면서도, 정작 대전하의 성정과 취향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의 속마음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엄격히 말하면 두 사람의 성정은 그야말로 물과 불처럼 서로 어긋났지만, 그해 왕비 마마가 대전하에게 품은 일편단심과 첫눈에 반한 마음으로 가문 어른들을 움직여 천군께 사혼을 청했던 것이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그를 행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현실로 끌어당겼다.
"대전하께 여쭙습니다. 아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얼른 미무림으로 돌아가 소의를 찾아 치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늦은 것 같소! 아누의 혼백이 이미 흩어지기 시작했소." 자연은 그렇게 말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누를 품에 안았다. 왼손으로는 아누를 감싸 안고, 오른손으로는 용어검을 불러들여 두 사람 위쪽으로 날아오르게 하며 그 태극검혼을 드러냈다.
"대전하, 절대 안 됩니다." 상수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는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이 자신의 수행을 억지로 건네주어 아누의 혼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이렇게 수행을 건네주는 일은 자신을 극도로 소모하는 일이었다. 아랫사람인 그가 어찌 존귀한 천족 대전하의 안위를 그저 지켜만 볼 수 있으랴?
"사정이 급박하고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약간의 수행을 소모하는 것쯤 나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자연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했다.
"대전하의 존귀하신 몸을 결코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인 상수에게 시키심이 어떨는지요." 상수가 공경히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러자 자연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며 불만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너의 목숨 또한 목숨이거늘, 네 수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그는 언짢은 얼굴로 상수를 흘겨보고는 다시 말했다. "너는 행아 낭자와 함께 옆에서 잘 경계나 하고 있어라. 지금 나는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으니, 주위의 안전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자연의 태도가 워낙 단호하고 완강한 것을 보고, 상수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지만 그저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연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명목상으로는 주종의 관계였지만, 자연은 한 번도 그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그가 자연을 모신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연과 동행하며 자연의 잔심부름을 거들어 준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그가 있으면 자연도 말할 상대가 있는 셈이었고, 그가 없다면 자연은 필시 더욱 외로워질 터였다. 그는 자연에게 지기이자 형제였다. 지기이자 형제인데 어찌 존귀함과 비천함의 구별이 있으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상수는 아쉬운 대로 경계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누가 그더러 수행이 대전하에 한참 못 미친다 했던가. 만약 그가 더 높은 수행을 지녔더라면 대전하도 이 일을 그에게 맡겨 주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득 엄숙하고 고요한 얼굴을 한 자연을 바라보다가, 그의 눈 속에 은은히 감도는 낯선 부드러운 빛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 부드러운 빛은 곧장 그의 팔에 안긴 사람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상수는 다시 한번 얼이 빠졌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어쩌면 자신이 아무리 수행이 높아진다 해도, 대전하는 이 일을 결코 남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 눈빛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자신이 생각했던 바가 그대로 증명된 셈이 아닌가?
밤빛이 점점 짙어지고 달빛이 교교히 비추는 가운데, 그 부드러운 빛과 자연의 눈에 가득한 다정함이 서로 어우러져, 이미 숨이 실낱같던 아누의 몸 위로 흩뿌려졌다. 자연의 그윽하고 정묘한 수행이 그녀에게 무한한 생기를 불어넣자, 그녀의 얼굴빛은 창백함에서 서서히 붉은빛을 띠어 갔고, 마침내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자…… 자연……?" 눈을 뜨자마자 자연이 자신에게 수행을 건네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누는 아직 몽롱한 채로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대는 유명계의 진법에 갇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소. 다행히 며칠 전 그대에게 옥패를 주었던 것이 과연 위급한 순간에 제 몫을 했구려." 자연은 아누가 깨어난 것을 보고 나직이 숨을 내쉬며 용어검을 거두어들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연은 요점을 살짝 비켜 가며 설명했지만, 아누는 여전히 아리송하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자연의 품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끄러워 곧바로 일어나려 했으나, 온몸이 마치 제 것이 아닌 듯 힘없이 늘어져 다시 자연의 품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난번에는 정신을 잃은 채 자연에게 안겨 미무림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때는 의식이 전혀 없었기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자연의 품에 안겨 있으니, 소의와 아버지, 오라버니들 말고 다른 남자에게 안겨 본 적이 있었던가?
"이 무례한 사람 같으니……" 아누는 다급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빼려 해도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그저 멋쩍은 듯 한마디 욕만 내뱉었다.
"아누, 원망하지 마시오! 자연은 그런 무도한 사람이 아니오. 사정이 다급하여 어쩔 수 없었을 뿐, 아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 자연이 부득이 무례를 범한 것이니, 부디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오."
"당신……"
아누가 뭐라 말을 하려는데, 상수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공주 전하께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지 마시고 남의 호의를 몰라보지 마십시오. 대전하께서 얼마만큼의 수행을 건네주셨는지도 모르시면서, 그 덕에 목숨을 건지시고도 도리어 대전하를 나무라시다니요?" 상수가 다급히 달려와 자연의 낯빛을 유심히 살폈다. 자연의 상태가 어떤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말 시킨 적 없다." 자연의 낯빛이 어둡고 침침했다. 상수의 말이 못마땅해서인지, 아니면 몸이 불편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상수의 말을 듣고서야 아누는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옆에 있는 행아를 바라보았고, 행아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연의 얼굴에 어린 어두운 기색을 보자 부끄러움도 잊고 서둘러 자연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제가 함부로 말했어요."
"괜찮소,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자연이 아누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지만,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만약 이토록 가까이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명 수행을 건네준 탓에 몸이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자연은 애써 그것을 감추려 하면서도 미간 사이에 그 낌새가 살짝 드러나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겨우 천 년의 수행쯤이야 나도 견딜 수 있소. 그대가 깨어난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오." 자연은 몸이 편치 않으면서도 여전히 그 온화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자연……" 그 말을 듣고 아누는 마음속에 미안함이 밀려왔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소! 사람 목숨 하나 구하는 것이 칠급 부도를 세우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소,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그대는 아직 몸이 약하니 우선 말은 그만하고, 내가 미무림으로 데려다주겠소." 말을 마치고 자연이 손을 들어 술법을 부리자, 곁 땅바닥에 놓여 있던 옥패가 날아올라 아누의 허리춤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갑시다!" 자연이 몸을 일으키며 아누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당신…… 소의는 부르지 않으면 안 될까요? 저…… 저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자연의 품에 안긴 채, 아누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소의는…… 아직 사람의 형상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소. 나 때문에 억지로…… 억지로 사람의 형상으로 화할 때마다, 그만큼…… 그만큼 그가 사람으로 화할 시기가 더 늦춰지는 것이오. 나는…… 조금 힘들 뿐이니, 쉬면…… 곧 나아질 것이오. 방해하지…… 방해하지 마시오."
아누는 힘겹게 말을 마치고 자연의 다정한 눈빛과 마주쳤다. 옥으로 조각한 듯 곱디고운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지만, 존귀함 속에 유아하고 온화한 기품이 서려 있어 그녀는 도무지 시선을 피할 곳이 없었다. 그저 얼굴을 자연의 가슴께에 파묻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여겼다.
"알겠소." 귓가에 전해지는 자연의 맑고 담담한 목소리에, 아누는 더는 자연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그 훤칠하고 준수한 용모는 그녀를 참으로 어찌할 바 모르게 압도했다.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어 그의 용모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찬찬히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만약 그녀에게 인간의 심장이 있었다면 아마도 미친 듯이 뛰었을 것이다. 어딘가 낯선 느낌이 서서히 아누의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옅고도 담담하지만 그 여운은 길게 이어졌다. 천 년의 수행을 조금도 주저 없이 그녀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불편함을 억누른 채 여전히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지키며 미무림으로 무사히 데려다주고 있었다. 이런 용모, 이런 성정, 이런 정성. 감동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저 자연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의 몸에서 자연스레 풍겨 오는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자연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따라 그의 옥수와 같은 풍채와 걸음걸음의 여유로움을 느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