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연의 급구
본래 자연은 범계에 자주 내려오지 않았다. 범계의 질서가 운행되는 데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설령 이따금 내려온다 해도 되도록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금빛을 억제하려 애썼다. 오늘은 사정이 워낙 급박했다. 아누가 위험에 처했음을 감지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범계로 날아 내려왔고, 이미 근처에 범인이 없다는 것을 감지했기에 굳이 광채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저 빛을 보면 도망치는 어둠의 무리에게야말로 이런 높은 수행의 금빛 위압이 필요한 법이었다.
"대전하!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참으로 괴이해 보입니다." 상수가 검은 회오리를 한 번 훑어보았지만 도무지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 자연에게 물었다.
상수는 방금 전 자연이 천군과 정사를 논의하고 침전 앞까지 걸어왔을 때, 자연이 문득 손으로 가슴을 살짝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누에게 변고가 생겼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곧바로 자취를 감춘 것을 눈여겨보았었다. 상수는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뒤따라왔다가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이었다.
자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한참을 응시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백 년 전 이곳에서 참혹한 전쟁이 있었소. 피가 강을 이루고 시신이 들판을 뒤덮었으며,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되풀이되었소. 예전에는 드넓은 평원이었으나 이제는 이렇게 울창한 숲이 되었으니, 참으로 상전벽해로다.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혼들이 참혹하게 죽어 응어리진 원한의 기운이 이곳에 이런 사악한 진법을 펼쳐 놓아, 지나가는 이들의 정혼을 빨아들여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있소. 어느 정도 재간이 있다고는 해도 이것은 범인이나 수행이 얕은 하급 선인, 하급 요괴에게나 위협이 되는 법. 아누는 법력이 강하니 마땅히 이것에 화를 입을 리 없거늘."
"아마도 아누가 어젯밤 술을 마셔서……" 행아가 몸을 낮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행아의 대답을 들은 자연의 얼굴에 몇 가닥 무력함이 스쳐 지나갔다. 아수라족은 본래 술에 약했지만, 지금은 죄를 따지거나 원인을 캐물을 때가 아니었다. 아누가 저 안에서 한순간이라도 더 머문다면 그만큼 위험도 더해질 뿐,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어찌 한순간이라도 지체할 수 있으랴? 순식간에 용어검이 그의 소매 속에서 솟구쳐 나왔고, 자연은 용어검을 타고 몸을 날렸다. 회오리바람에 옷자락이 나부끼고 귀밑머리가 흩날렸으며, 평소 온화하고 유아한 얼굴에는 순식간에 서늘한 냉기가 어렸다. 겨우 눈앞의 상황을 파악한 상수는 고개를 들었다가 자연이 손을 쓰려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몸을 날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고작 유명계의 사술이니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대전하께서 직접 손을 쓰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자연은 두 손을 맞잡고 결을 맺으며 정신을 집중한 채 말했다. "그 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어서 진을 깨야 한다. 그대가 감당할 수 있음은 알지만 조금이라도 지체될까 두렵다. 이 일은 급히 처리해야지 늦출 수 없으니, 속전속결이라야 한다. 그대는 옆에서 대기하라."
"예." 상수는 그 말을 듣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고는 옆에서 지켜만 보았다. 그는 아득한 눈길로 자연을 바라보며, 대개는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 너그럽고 온화하기 그지없는 대전하가 이토록 쉽사리 매정한 수단을 쓸 리 없었다.
그 용어검은 순식간에 거대한 금룡으로 변하여 공중에서 몸을 뒤틀며 울부짖고, 검은 회오리를 몇 겹으로 휘감았다. 온몸이 찬란한 금빛으로 뒤덮인 그 용의 기세에 눌려 검은 회오리는 별안간 기세를 잃고 회전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자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을 들어 올리자 금룡이 한 번 크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구름을 뒤흔들 만큼 우렁차, 나무와 산돌마저 진동했다. 이어 곧장 회오리의 중심을 향해 급강하하니, 마침내 그 검은 회오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산야를 뒤덮는 부서진 검은 안개와 먼지로 화하였다.
그러나 그 검은 안개와 먼지는 자연과 금룡의 눈부신 금빛에 낱낱이 비추어져 조금도 은폐될 곳이 없었다. 검은 안개 속에서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니고 늙은 것 같으면서도 늙지 않은 노인의 형상이 드러났으니, 얼굴에는 이목구비도 없이 오직 흉악한 기운 한 덩어리만이 자연을 향해 서늘하고 노기 어린 눈빛을 스쳐 보냈다. 그의 백발은 노기에 휩쓸려 어지러이 흩날렸고, 혼돈스러운 얼굴 살갗을 배경으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지도 않았건만 그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그 노인은 원통함에 사무쳐 두 손을 내뻗었고, 손바닥 한가운데서 수많은 귀매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차가운 웃음소리와 곡소리를 뒤섞은 채 자연을 향해 에워싸며 덮쳐 왔다.
말이 그렇다고 해도 그 사이는 순식간이었다. 자연이 소매를 가볍게 떨치자 발밑의 금룡은 순식간에 수천수만의 찬란한 금빛을 뿜는 용어신검으로 화하여, 겹겹이 첩첩이 산봉우리가 겹쳐지듯 질서정연하게 늘어섰다. 검과 검 사이에는 황금빛 거대한 그물이 엮여, 셀 수 없이 많은 귀매들이 그를 향해 덮쳐드는 것을 일망타진하니, 순식간에 하나하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귀매들의 차가운 웃음소리와 곡소리는 이내 처절한 비명으로 바뀌어 숲속에 가득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행아는 다리가 풀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 기괴하고 흉악한 노인은 그 광경을 보고 더욱더 원한에 사무쳐, 눈앞의 상대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늘도 나를 저버리고, 세상 사람들도 나를 저버렸으니,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칼과 창이 몸에 꽂히고 죽어서도 묻힐 땅조차 없었으니, 그저 남들에게도 그 맛을 한번 보여 주려는 것뿐인데, 귀인께서는 어찌하여 내 좋은 일을 그르치려 하시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다시 귀매들을 불러내어 자연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려 하며 틈을 타 일신에 서늘한 기운을 끌어모아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뒤틀린 결계가 나타났고, 노인은 재빠르게 그 안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몸이 한 번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격렬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용어주검이 정면으로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고, 상수 역시 검을 들어 다시 한 칼을 보탰다. 노인은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도 그저 눈을 뜬 채 몸이라 할 수도 없는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혼백이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자연은 노인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양손을 놀려 수많은 검을 일제히 쏟아 냈다. 마치 성난 파도처럼, 해일처럼, 한 물결이 지나가면 또 한 물결이 이어지며 그 노인이 펼쳐 놓은 결계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녀가 결계 안에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컸다. 자연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매서운 공세가 곧바로 결계에 하나의 구멍을 뚫어 놓았고, 자연은 즉시 몸을 날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결계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