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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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술이 부른 화

정령들의 말에 따르면, 노신선이 가르친 근 이십 년의 세월 동안 학업이 워낙 고되고 노신선의 요구 또한 지극히 엄격했기에, 소의는 다른 정령들과 어울려 놀거나 장난친 적이 없었으며 수사를 건너 숲으로 돌아가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아누가 법기를 시험하며 그를 두들겨 코가 시퍼렇게 멍들 때마다 소의는 몰래 상처약을 챙겨 숲으로 돌아가 정령들에게 내복약과 바르는 약을 나눠 주곤 했고, 그때마다 정령들은 이렇게 놀려 대곤 했다. "마누라는 앞에서 사람을 패고, 자기는 뒤에서 구해 주고. 하나는 악역, 하나는 선한 역, 대체 누구한테 보여 주려고 이러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필요 없으면 관두든가, 안 받으면 도로 가져갈 거야."

"약은 내려놓고 가. 안 받으면 손해지. 이까짓 살갗 상처야 사람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진 않아도, 약을 쓰면 그래도 빨리 낫잖아. 조금이라도 덜 고생해야지. 네 마누라가 워낙 사나워서 우리도 감히 찍소리 못 하는데, 그래도 너한테서 뭐라도 보상은 받아야 할 거 아니야!"

"받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소의는 그때마다 약을 내려놓고 얼굴을 붉히며 수사로 도망치듯 돌아가곤 했다……

쓸데없는 소리였을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누를 제외한 미무림의 모두가 이미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노신선이 만리 가운데서 소의를 골라 문하에 들인 그날부터, 다들 속으로는 훤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신선이 어디 함부로 제자를 거두는 사람이던가? 듣기로 천정의 약왕이 그의 큰제자라고 했다. 스승은 천정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원치 않아 자신의 제자를 그 자리에 추천한 것이었다. 노신선은 천하를 유랑하기를 즐겼고, 자비로운 손길로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구했으니 마계조차 그에게 적잖은 신세를 진 터라, 삼계 안에서 그를 붙들어 둘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정도이든 사도이든 가리지 않고 길을 열어 환대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 그런 그가 굳이 미무림에 근 이십 년을 머문 것은 결코 일시적인 흥으로 제자나 하나 거둬 심심풀이할 요량이 아니었다. 그는 부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 아수라왕 내외의 "재앙을 없애 주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신선의 부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다름 아닌 아수라 왕후의 본가 친족 어른이었다. 그해 노신선이 미인을 얻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러니 어찌 감히 부인의 뜻을 거스를 수 있으랴?

그러므로 노신선이 미무림에 온 진짜 목적은 제자를 거두는 데 있지 않고, 아누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는 데 있었다.

그러나 좋은 신랑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 없으니, 제자를 거두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편이었다. 아누처럼 신분과 미모를 갖춘 여인을 아무 남자나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제자를 거두려는 뜻은 실로 분명했다. 첫째는 노신선과 왕후의 뜻에 따라 뛰어난 인재로 조련해 내는 것, 둘째는 제자를 거둠으로써 훗날 아누의 남편이 될 사람의 신분을 높여 주는 것이었다. 노신선의 제자라는 명분을 등에 업으면 삼계 안에서 누가 삼 분의 경의를 표하지 않으랴? 하지만 아무리 사내가 출중해도 아누가 그를 마음에 들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만약 대놓고 소의가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 일러 준다면 오히려 아누의 마음속에 거부감이 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를 아누의 삶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하면 두 사람이 저절로 깊은 정을 쌓을 수 있을 터, 반드시 아누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해도 깊은 정만 쌓인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어쨌든 아누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었다.

모든 준비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동풍뿐이었다.

그 동풍이란 대체 무엇인가?

다름 아닌 아누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두서없는 생각에 잠겨 있던 행아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아누의 잠꼬대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아누, 일어나!" 행아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켜 미간을 찌푸린 채 옆에 있는 아누를 흔들었다.

"대낮부터 무슨 꿈을 그렇게 꿔? 설마 아직도 술기운이 안 가신 거야?" 그녀는 아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행아가 흔들고 두드린 끝에 아누는 겨우 악몽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왜 때려?" 아누가 행아를 흘겨보았다.

"말이라고! 네 잠꼬대에 시달려서 깬 거야, 입으로 계속 '소의야 가지 마' 이러던데, 나는 소의가 아니니까 때려서 깨울 수밖에. 우리 이제 미무림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이렇게 오래 지체했으니 얼른 가야지, 만에 하나 네 아버지한테라도 들키면 이번엔 진짜 못 빠져나가."행아가 투덜대며 어느새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아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릿속이 아직 몽롱했다. 술 한 잔을 마셨고, 행아가 자신을 끌고 갔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평소에는 한 사람이 한 방씩 자서 다행이지, 요 며칠은 정말 너 때문에 못 살겠더라. 잠 좀 얌전히 자면 안 되나, 발로 차고 때리고 잠꼬대까지 끊임없이 해 대서 사람 편히 못 자게 하고. 앞으로 네 신랑 될 사람도 참 고생이겠다……" 행아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대낮부터 무슨 헛소리야?" 아누가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 행아에게 던졌다. "또 그런 소리 하면 우리 아버지가 손보시기 전에 내가 먼저 널 때려죽일 거야!" 말하는 사이 그녀의 얼굴도 붉어졌고, 침상에서 뛰어내려 행아를 쫓아가며 때릴 듯 위협했다.

행아는 쫓아오는 아누를 보며 도망치면서도 놀려 댔다. "너처럼 사나운 마누라 얻을 네 신랑도 참 고생길이 훤하네……"

"너…… 너……" 아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부끄럽고도 화가 나서 몇 바퀴를 쫓아 때리다가 숨을 헐떡이며 걸상에 주저앉았다.

숨이 차다고? 그럴 리가. 좁은 방 안에서 겨우 몇 바퀴 돈 것뿐인데, 범인이라도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텐데. 오늘 아침 자신은 대체 왜 이런 걸까? 그러다 문득 그 죽일 놈의 술 한 잔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도 발밑이 허청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을 보면 필시 그 죽일 놈의 술이 작간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이것 봐, 이게 다 술 욕심 부린 결과야. 그럼 우리 갈까, 말까?" 아누의 모습을 보며 행아가 걱정스러운 낯빛을 지었다.

"웬 호들갑이야, 그저 조금 숙취가 있을 뿐인데, 미무림에 돌아가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얼른 아귀랑 만춘 부부한테 작별 인사부터 하고 길을 나서자." 아누가 자신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그리하여 자매는 아침을 먹은 뒤 아귀와 만춘에게 작별을 고했다. 행복이 가득한 두 사람의 미소를 보며 아누도 마음이 흐뭇해졌고, 그렇게 기분 좋게 숙취를 안은 채 안성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청계진에서 안성으로 오는 길에 아누와 행아가 마차를 타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아귀가 의심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에는 두 사람뿐이니 신족통을 펼치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무림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족통이라는 능력의 고하는 각자의 수행 정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법인데, 행아는 법력이 미약해 신족통도 그리 신통치 않아 대개는 아누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의 아누는 이른 아침부터 숙취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의식이 몽롱하고 발밑이 허청거려 동서남북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듯했다. 걷고 또 걸어도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울창한 숲이기는 한데 아무리 봐도 미무림이 아니었다. 무성한 숲속을 오락가락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심란해졌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두 처녀는 점점 두려움이 밀려들었고, 행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 나도 모르겠어……" 아누도 초조한 낯빛이었다.

"너 왜 이래? 숙취가 아직도 안 가셨어? 이거 어쩌면 좋아?"

사실 아누도 속으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원래 미무림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이따금 왕정에 돌아가는 것 외에는 기껏해야 청계진 근처를 돌아다니는 정도였을 뿐, 이렇게 낯선 곳까지 미무림을 벗어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이렇게 흐리멍덩하지만 않았어도 별일 아니었을 텐데, 어젯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지만 않았어도 이런 지경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초조할수록 더욱 당황하게 되는 법. 아누는 원래 불같은 성정의 처녀라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 리 없었지만, 지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평소의 그 사나운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당한 아수라족 여인인 그녀가 지금 미무림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니.

그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미무림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녀의 마음은 무섭도록 조여들었고, 행아의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두려움은 서로 전염되고 증폭되어, 어느새 냉정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나무 사이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침 안성을 떠날 때의 아침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어스름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본디 음산한 숲은 밤빛이 더더욱 일찍 내려앉았다. 거의 하루를 꼬박 허비하고도 그들은 여전히 당혹감과 막막함 속에 갇혀 있었다.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행아는 아누에게 우선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자고 권하려 했다. 어쩌면 그러다 보면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막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시커먼 회오리바람이 사납게 몰아쳤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아누와 행아가 미처 피하지 못한 사이 순식간에 회오리바람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누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인간계의 아무리 큰 비바람이라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터인데, 어찌 그녀를 휩쓸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힘껏 행아를 밀쳐 내보냈다. 행아는 회오리바람 가장자리에 세차게 휩쓸려 튕겨져 나갔고, 그 힘이 어찌나 사나웠는지 그대로 큰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오장육부가 다 아릴 지경이었다. 이어 땅바닥에 세게 나동그라진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위험 밖으로 밀어낸 아누가 걱정되어 애써 눈을 뜨고 아누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곳 어디에도 아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검은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운 혼돈의 기운 한 덩어리만이 멀지 않은 곳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고, 주변의 나뭇가지와 잎사귀들도 그 회오리 주변의 기류에 휩쓸려 위태롭게 떨며 이리저리 흔들려 거의 뿌리째 뽑힐 지경이었다.

"아누!" 아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행아는 자신의 몸이 아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녀를 부르짖으며, 그 검은 회오리를 향해 손을 휘둘러 술법을 걸었다. 어떻게든 틈을 벌려 보려는 것이었다. 아누가 어쩌면 그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찌 되었든 먼저 아누를 구해 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법력이 너무 약한 탓인지, 아니면 저 검은 회오리가 워낙 기괴한 것인지, 그녀는 아누처럼 신통이 광대하지는 못해도 인간계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천재지변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었건만, 지금은 어찌하여 이토록 무기력한 것인가? 무슨 술법을 부려도 저 검은 회오리에 닿기만 하면 마치 삼켜지듯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 아누가 자신을 세차게 밀어냈던 순간이 떠올랐고,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아누가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면 어찌 저 검은 회오리 안에 갇혀 있겠는가? 그 한 번의 밀침은 분명 아누가 이 회오리의 이상함을 알아채고 자신을 위험에서 재빨리 밀어낸 것이었다.

그래,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행아는 더욱 철저히 당황하고 말았다. 만약 아누마저 저 안에 갇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처지라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 이 위기를 뒤집을 수 있으랴?

한편 검은 회오리 안에 갇힌 아누는 처음에는 오히려 두렵지 않았다. 우선 행아를 위험 밖으로 빼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렇게 하면 뒷걱정 없이 이 기이하고 사나운 기세로 몰려오는 "괴물"에 온전히 맞설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 "괴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선한 무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자신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마당에 행아까지 더해져 봐야 위험한 사람이 하나 더 느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작 스스로 법력을 부리려 하자 조금의 기운도 낼 수가 없었다. 마치 검은 회오리가 끊임없이 자신의 영력을 빨아들이는 듯했고, 힘을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체력마저도 한 방울 한 방울 새어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기분은 참으로 좋지 않았다. 적어도 태어난 이래로 그녀는 지금처럼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몸은 갈수록 말을 듣지 않았고 손발도 점점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번 구두사괴와 맞섰을 때, 자신의 매혹술에 휘말린 어린 남자아이를 구하며 죽음도 각오했던 그 순간에도 이토록 벌벌 떨지는 않았었다. 이렇게 서서히 생명력을 비워 가는 방식은 유독 사람을 괴롭게 했고, 마침내 의식마저도 점점 흐려져 갔다. 몸과 정신이 동시에 무력해지는 이중의 절망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큰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넷째 오라버니…… 누가…… 누가…… 저를…… 구해…… 주세요?" 오래도록 버티던 아누도 결국은 힘없이 가족들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희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어서도 끝내 알아내지 못한단 말인가? 법력이 높고 하늘도 땅도 두렵지 않다던 아수라족 여인이라 자부하지 않았던가? 아누가 거듭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절망에 빠져 가던 그 순간, 문득 자연이라는 천족 대전하가 그녀에게 옥패 하나를 건네주며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이 그녀를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그가 당부했던 말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본래는 그다지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이제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른 그녀로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경이니 죽은 말도 산 말인 셈 치고 치료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의 아누는 눈앞의 다섯 손가락도 보이지 않았고, 귓가에는 오직 사나운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힘없이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어 옥패를 찾아내고는 힘겹게 그것을 꺼냈다.

"자연…… 자연……"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옥패를 향해 자연의 이름을 불렀다.

"자연…… 구해…… 줘요……"

천인은 본래 법력이 아수라족보다 위였으나, 다만 체면 때문에 아수라족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연은 천인일 뿐 아니라 소문에 따르면 천인 가운데서도 수행이 깊고 정교하기로 손꼽히는 대전하였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신통이 광대하여 그녀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누는 이미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 행아는 초조하게 온 힘을 다해 검은 회오리 속으로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 검은 회오리를 조금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누가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한 이상 아무리 나약하고 무력해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왕과 왕후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그녀와 아누는 오랫동안 자매처럼 지내 왔으며 어쩌면 친자매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가장 위급한 순간에도 아누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안위였는데, 어찌 그녀가 가벼이 포기할 수 있으랴? 다만 그녀의 법력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동안 늘 아누에게 의지해 왔고, 오랜 세월 미무림에서 지내며 적을 만날 일이 없었기에 자신의 법력을 갈고닦는 데 소홀했으니, 이제 와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아누! 아누!"

숲 전체에는 바람 소리 외에 오직 행아의 처절한 외침만이 울려 퍼졌다. 목이 쉬어 소리도 나오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문득 눈앞에 금빛 광채가 휘감기며 이미 캄캄해진 숲 전체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바로 그 금빛의 감쌈으로 인해 검은 회오리는 순식간에 억눌려 그 범위와 위력이 곧바로 줄어들었다.

이어서 행아는 금빛과 함께 나타난 자연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상수도 자연을 따라 도착했다.

"대전하!" 자연이 홀연히 나타난 것을 보고, 이미 히스테리 직전까지 몰렸던 행아는 문득 희망을 느꼈다.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았다. 자연이 어찌하여 이곳에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모든 희망을 자연에게 걸 수밖에 없었다.

"대전하…… 아누가…… 아누가 저 안에 갇혔어요, 생사를 알 수 없어요." 행아는 울면서 그 검은 회오리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대체 무엇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보통 회오리바람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누가 저 안에 갇힐 리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