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궁한 이를 구하여 명성이 관직에 드러나고, 억울한 옥사를 신원하여 경사가 후세에 흐르다
《화당춘(畫堂春)》:
예로부터 오직 선함만이 하늘을 감동시킨다 하니, 하물며 억울함을 풀고 위태로움을 떠받침이랴. 사람과 신이 서로 공경하며 의지하되, 편안함과 즐거움에는 기약이 없도다. 책을 쌓아 둔다고 반드시 읽게 되는 것 아니요, 금을 쌓아 둔다고 반드시 살찌는 것 아니라; 차라리 덕을 쌓아 자손의 가지에 물려줌만 같지 못하니, 부귀가 어찌 의심스러우랴.
《역전(易傳)》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라 하였으니, 이 말은 화와 복이 오직 사람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요, 하늘이 사사로이 두텁고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이른다. 그런데 선을 쌓되 은밀히 쌓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불선을 쌓되 은밀히 쌓는 것보다 큰 것 또한 없다. 그러므로 음덕(陰德)의 경사는 가장 오래가고, 음독(陰毒)의 응보는 가장 혹독하다. 형옥(刑獄)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 관계가 더욱 중하니, 마음을 공평하고 너그럽게 먹으면 죽을 자도 살릴 수 있고, 생각을 각박하고 깊게 부리면 살 자도 즉시 죽인다. 하물며 뇌물을 받고 법을 굽혀 고의로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야!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무거운데, 어찌 나의 희노(喜怒)에 맡기고 마음대로 어육(魚肉)처럼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옛말에 이르기를: "권세를 잡고도 방편을 베풀지 않으면, 보물산에 들어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사대부가 사권(事權)을 손에 쥐고서도 억울한 옥사를 변별하여 신원하지 않고, 무고한 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상천(上天)의 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漢)나라 때 우공(于公)이라는 이가 있어 옥리(獄吏)로서 법을 공평하게 지키고, 효부(孝婦)의 억울함을 밝혔다. 일찍이 자신의 문도(門道)를 높고 크게 지으며 말하였다: "나의 자손 중에 반드시 현달한 이가 나오리라." 후에 그의 아들 정국(定國)이 과연 정위(廷尉)가 되어 그 말과 같았다.
당(唐)나라 때 하비건(何比乾)이라는 이가 있어 서유공(徐有功), 래준신(來俊臣), 후사지(侯思止)와 함께 형관(刑官)이 되었다. 비건은 너그럽고 용서하여 많은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하기를: "래(來)와 후(侯)를 만나면 반드시 죽고, 서(徐)와 하(何)를 지나면 반드시 산다"라 하였다. 하루는 한 늙은 할미가 그의 문 앞을 지나며 산가지 구십여 개를 들고 비건에게 말하였다: "그대에게는 음덕이 있으니, 자손 중에 공경(公卿)과 군수(郡守)가 되어 인수(印綬)를 찰 자가 마땅히 이 산가지 수만큼이나 될 것입니다." 후에 과연 대대로 통현(通顯)하였다.
송(宋)나라 때 장경(張慶)이라는 이가 있어 옥관(獄官)이 되어, 감옥을 청소할 때면 반드시 깨끗이 하게 하였고, 죄수들에게 음식을 주어 굶주리거나 춥지 않게 하였으며, 병든 자에게는 의약을 빠짐없이 베풀었다. 비록 억울함을 신원하고 잘못을 바로잡지는 못하였으나, 그 자손들도 과거에 급제하는 보답을 얻었다.
주흥(周興), 길경(吉頸) 같은 무리에 이르러서는, 덫과 그물을 호호(號)로 삼고, 무고와 모함으로 경전(經典)을 삼아, 백성을 기울어뜨려 모함하고 사대부에게 독을 흘렸으니, 마침내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놓이고 처자와 종족까지 함께 참륙(斬戮)을 당하였으니, 그것이 선인의 응보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이에 비루한 말을 엮어 감회를 기록하노라:
붉은 붓 가벼이 내리지 말라, 창생(蒼黔)의 死生이 매였으니.
잠시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잊는다면, 곧장 솥과 가마솥에 삶기리라.
바라는 바는 너그럽고 어진 관리라, 법을 받들고 공평함 지키는 이.
복숭아나무의 무성한 열매를 바라지 않더라도, 어찌 귀신 우는 뜰을 견딜 수 있으랴.
황제도 오히려 청문(淸問)하시거늘, 정평(廷評)이 감히 제 마음대로 하랴?
묘소를 쓸어주던 이 이제 도살자 옆에 누웠고, 항아리를 건네받아 주흥(周興)을 청하노라.
어찌 우정국(于定國)만 같으랴, 높은 문이 세상에 영광이 되었으니.
응보는 어긋나지 않는다 하니, 감히 형관(司刑)에게 고하노라.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 권한이 자기에게 있고 출입이 마음에 따르는 경우이니, 즉 억울함을 신원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관직이 낮고 지위가 작아, 사권(事權)도 없고 또 돈을 아껴 명예를 사지도 않으면서도, 능히 억울함을 밝히고 갇힌 이를 풀어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가정(嘉靖) 연간에, 성은 요(姚)요 이름은 일상(一祥)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송강부(松江府) 상해현(上海縣) 사람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나 가산은 넉넉하였고, 사람됨이 거침없고 얽매임이 없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높였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익히고 시문을 잘 지어, 동생(童生) 시험을 여러 번 보았으나 때가 맞지 않아 입학하지 못하였으므로, 향리에서 비웃는 이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태연히 받아들이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외아들을 기르며 오로지 그가 공명으로 빛나기를 바랐다. 이에 집안에 쌓아 둔 것을 거두어들이니, 약 사오백 금이 되었고, 그를 남경(南京)에 보내 납감(納監)하게 하였다. 일상은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아내와 작별하고 두 하인을 데리고 곧 출발하였다.
남경은 옛날 금릉(金陵)이라 칭하고 또한 말릉(秣陵)이라고도 하니,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제왕의 큰 도읍이다. 동진(東晉)이 강을 건넌 이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이 모두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그 후 또 남당(南唐)의 이경(李璟), 이욱(李煜)이 도읍을 세웠으니, 그 장려하고 번화함이 동남(東南)의 으뜸이었다. 왕개보(王介甫)의 《금릉회고(金陵懷古)》 사(詞)가 이를 증명할 수 있으니, 《계지향(桂枝香)》:
높이 올라 눈을 보내니, 고국의 늦가을이라, 날씨가 막 쌀쌀해졌도다. 씻은 듯 맑은 강이 비단 같고, 푸른 봉우리가 무리지어 솟았도다. 떠나는 배 저어 가는 것이 저녁 햇살 속에, 서풍을 등지고 주막 깃발 비스듬히 솟아 있도다. 채색 배에 구름이 옅게 깔리고, 은하수에 이슬이 피어오르니, 그림으로도 다 담지 못하리로다.
생각하니 예로부터 호화로움 서로 다투었으되, 한스럽도다 문 밖 누대 위에서 슬픔과 한이 이어졌도다. 천고(千古)에 높이 올라 이를 대하며, 부질없이 영욕을 탄식할 뿐이로다. 육조(六朝)의 옛일은 흐르는 물을 따라 사라졌고, 다만 차가운 연기와 쇠한 풀만 푸르름에 엉기었도다. 지금도 창기(商女)들이, 때때로 여전히 《후정(後庭)》의 유곡을 노래하는도다.
명조(明朝) 태조황제에 이르러 더욱 강토를 넓히고 궁전을 세우니, 온갖 관아와 아문이며 삼거리와 아홉 길이 있었다. 기이한 기술과 사치스러운 물건, 의관과 예악의 흐름, 고운 기녀와 어린 동자, 구류(九流)의 술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늘처럼 집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참으로 다 말할 수 없는 번화함이요, 다할 수 없는 쾌락이었다. 비록 북경으로 천도하여 궁전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나, 산천은 예와 같고 경물은 여전히 예 같아, 저절로 다른 성(省)의 군읍(郡邑)과는 달랐다.
일상이 성 안에 이르러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납감을 하러 가면 곧 감옥 속에 앉아 있어야 하니 마음껏 유람하기 어렵도다. 차라리 어딘가 거처를 찾아 며칠 유람하고 나서 처리하는 것이 낫겠다.' 이에 두 하인과 함께 진회하(秦淮河)의 도엽도(桃葉渡) 부근에서 강가 누방(河房)을 하나 빌려 머물렀다. 남경의 거처로는 강가 누방이 가장 비싸고 또 가장 정교하였으니, 서쪽 머리에는 공원(貢院)이 있고 강 건너에는 기루(妓樓)가 있었다. 그러므로 풍류 있고 호탕한 선비들이 기꺼이 은자를 더 내어 빌리는 것이었다.
하루를 쉬고 다음 날 바로 나가 유람하였는데, 이틀 사흘을 내리 놀다가 문득 무공방(武功坊)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기루(妓樓) 안으로 걸어 들어갔으니, 다만 이런 것을 보았다:
붉은 누각이 산봉우리인 듯, 비취빛 관사가 구름에 닿았도다. 굽은 난간 조각된 기둥, 수없이 많은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을 심어 두었고; 으슥한 방과 깊은 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보물 같은 비파와 옥 같은 퉁소 나열하였도다. 흥겨운 가락이 들보를 감돌고, 향기로운 기운이 코를 찔렀도다. 옥 같은 자태와 꽃 같은 용모, 사람마다 동부(洞府)의 신선 같은 자매들이요; 책상과 시 통마다, 각각이 문림(文林)의 학사 같았도다. 달빛이 다한다 해도 걱정 없으니, 원래부터 불야천(不夜天)이라 불렸고; 남은 분 향기가 실려 오니, 예부터 미혼의 땅이라 불렸도다. 다 할 수 없는 풍류의 본보기를 이루어, 얼마나 많은 젊은 영재들을 홀렸던가.
일상은 본래 창루에 드나들 생각이 없었으나, 한 번 그 문에 들어서서 이 광경을 보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기루의 오랜 이야기에 이르기를: "네가 영리하여 오지 않을까 걱정이지, 와서 영리하게 굴지 못할까를 걱정하지 않는다"라 하였으니, 따라서 빈손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가장 인색한 이라도 며칠을 머물고 수십 금을 쓴 뒤에야 나갈 수 있었다. 또 한 무리의 빈객 노릇 하는 한량들이 부추기고, 차갑게 흥을 돋우고 뜨겁게 아첨하니, 아무리 노성(老成)한 식견이 있더라도 단번에 무사히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일상은 또 풍류 있고 호방하여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 한순간에 두 기녀에게 눈이 꽂혀 크게 손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어느 누가 그를 받들지 않겠는가? 며칠이 지나 마침내 하인들에게 행리를 기루 안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기루에서는 사내 손님의 하인들을 위해 잡일하는 시녀들이 곁에서 자게 해 주는 관례가 있었으니, 따라서 두 하인도 즐겁게 지내며 정작 해야 할 일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요군(姚君)은 명리를 다투던 마음을 옥 같은 이를 아끼는 마음으로 바꾸어, 납감에 쓸 넉넉한 자금을 모두 기루의 화대로 탕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절반이 줄어들었다. 계산해 보니 납감은 글렀으니 차라리 마음껏 즐기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게다가 빈객 노릇 하는 한량들이 밤낮으로 부추기고 달래어, 음악과 노래 춤, 주사위와 투호가 끊이지 않으니, 그 속에 취해 누워 마음껏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머니 속 것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었다.
하루는 한량들이 그를 청하여 우화대(雨花台)에 유람을 갔다. 왼쪽에도 미인, 오른쪽에도 미인, 앞에는 거문고와 피리가 가득하고, 거짓으로 아부하고 열렬히 달래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의 노잣돈을 말끔히 털어 멀리 내보내려는 것이었다. 독자여, 그대는 이 장소가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무리는 사귈 만한 자들이었는가? 요군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여전히 통음하며 노래를 불렀고, 붓을 들어 시를 지어 그 즐거움을 기록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옛날에 경전을 논하던 곳이, 지금은 유람의 벌판이 되었도다.
막수(莫愁)가 일찍이 배를 매었고, 영운(靈運)도 이곳에 수레를 멈추었도다.
나누어지는 흰 빛에 맑은 강빛이 담기고, 나는 푸름이 나무 꼭대기 누각에 날아드는도다.
예로부터 가려운 땅이거늘, 득의(得意)하여 말을 잊어도 되겠는가?
시를 다 쓰자 여러 사람이 일제히 칭찬하며 말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재주라면 만 길의 용문(龍門)인들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각자 술잔을 들어 미리 축하하였다. 모두 한창 즐겁게 마시고 있는데, 홀연 한 사람이 해진 두건과 낡은 옷으로, 얼굴이 초췌하여 사람의 빛이라곤 없이 멍하니 다가와 요군에게 예를 올리며 구걸하였다. 요군은 거지인 줄 알고 별로 개의치 않아 하인에게 술과 음식을 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술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고 요군에게 말하였다: "저는 하남(河南)의 수재(秀才)로, 도중에 겁탈을 당하여 노잣돈을 잃고 몸에 상처를 입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으므로, 행로비를 구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어찌 술과 음식 따위의 작은 일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두 한량이 끼어들어 말하였다: "요 상공, 저자를 상대하지 마십시오. 이곳에는 이런 자들이 많은데, 모두 어려움을 당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남의 재물을 속여 빼앗는 자들입니다. 어디서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하고, 어디서 수재인지 아닌지를 조사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매우 불쾌한 기색이 되어 말하였다: "저는 겁탈을 당하여 죽을 뻔하였으나 타향에서 떠돌아다닐까 두려워 부득이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속된 사람에게 의심을 받으니 어찌 이곳에서 다시 도움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거짓말로 속여 빼앗는 무리가 아니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어찌 이 불초(不肖)하다는 이름을 감당하겠습니까, 모름지기 사실이 아님을 밝혀야겠습니다." 이에 옷을 벗어 보이니, 과연 칼에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핏자국이 여전히 옷에 묻어 있었다. 일상은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읍하며 사과하였다. 곧 하인에게 행리함을 가져오게 하여 주머니 속을 살펴보니, 다만 백은(白銀) 열 냥과 저고리 한 벌, 비단 저고리 한 벌이 있었다. 즉시 모두 그에게 주고, 또 술을 따라 전송하였다. 그 사람은 감읍하여 절하며 감사하고 요의 성명을 물어 떠났다. 그러나 요군은 묻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작은 도움을 주고도 은혜를 자랑하고 덕을 과시하는데, 하물며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이처럼 많이 도와주고도 성명을 묻지 않았으니, 참으로 은혜를 베풀되 보답을 구하지 않아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하였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이미 따르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음에랴.
요군은 이때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였다: '주머니가 이미 바닥났으니,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여기 더 있다가 기루의 노파에게 귀찮게 쫓겨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차라리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발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술도 마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루로 돌아와 행리와 이부자리를 챙기고 즉시 작별하였다. 두 기녀가 애타게 붙잡아 하룻밤을 더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하인을 시켜 배를 한 척 부르고 서둘러 출발하였다. 두 기녀가 울고불고 맹세를 늘어놓았으나, 모두 은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은자가 다 떨어진 것을 보고는 가짜로 손을 놓아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요군은 호탕한 사내라 두 기녀에게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고 곧장 배에 올랐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집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납감 일을 물어보자 일상은 한참 동안 감히 말을 못하다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하였다. 어머니는 발끈 크게 노하였다. 평소 일상이 가장 효성스러워 어머니의 명을 조심스럽게 받들었으나, 한때 흥에 올라 사오백 금을 낭비하고 은자를 잃어버렸음이 마음에는 별로 두지 않았으되, 다만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창루에서 밤을 새우며 업(業)을 낭비한 것이 크게 편치 않았으니, 후회해도 미칠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후에는 다시 감히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일이 년이 지나 이래서는 결말이 없겠다 싶어, 가까이 있는 현의 아전 자리를 납방하여 조그마한 전도를 도모하였다. 독자여, 그대는 이처럼 호방한 사람이 관아의 그 더러운 돈을 마음에 둘 것이라 생각하는가? 오로지 어려운 이를 구제하고 위태로운 이를 떠받치며 너그럽고 두텁게 남을 대할 뿐이었다. 관아에서도 그를 충직하고 후덕하다 칭찬하는 이도 있었고, 그를 바보로 보는 이도 있었다. 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고 웃는 대로 맡겨 두었다.
세월이 흘러 순식간에 육칠 년이 지나, 두 차례 고과(考課)가 차 예에 따라 경사(京師)에 올라가 봉직해야 하였다. 그때 어머니의 명에 따라 경사에서 삼 년간 일분의 낭비도 감히 하지 않았으며, 강서(江西) 구강부(九江府) 지사(知事)를 제수받았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부(本府)의 사옥사(司獄司)에 결원이 생기자 상사가 그에게 겸관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이에 마음을 다해 처리하고, 여러 죄수를 도와 경범죄자로 잠시 갇힌 자는 물론이거니와 가혹하게 학대하지 않았다. 중죄인이 있는 감방에도 친히 가서 보아, 더러운 것은 깨끗이 하고 병든 자는 치료하고 굶주리고 추운 자는 입히고 먹였다. 사람마다 은덕을 입고 각각 감사함을 느꼈다.
무고하게 함정에 빠진 이, 또는 상관의 불공정과 불명한 처결로 매를 맞아 억지 자백을 한 이들에 대해서는, 그가 모두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편리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를 만나면 기꺼이 해명해 주었다. 스스로 관직이 낮고 지위가 작아, 억울함을 알면서도 신원할 수 없음을 한스러워하였으며, 매양 부끄러움을 품었다. 이 때문에 관아에는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나물로 먹고 베옷을 입으며 담담하게 살았다. 일찍이 벽에 작은 시 한 수를 적었으니, 시에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순박한 옛날과 같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땅에 선을 그어 지키는 풍속이 없도다.
언제나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을 얻어, 저 성 안을 꿰뚫는 죄인 없게 할 수 있을까.
시로써 뜻을 드러냈으니. 그의 시 뜻을 보면 소요부(邵堯夫)가 "하늘이 항상 좋은 사람을 내시기를 바라고, 사람이 항상 좋은 일을 행하기를 바란다"고 한 것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 그의 평소 마음씀을 가히 알 수 있다.
반 년이 지나 새 안찰사(按察使)가 부임하였다. 크고 작은 관원이 모두 인사를 가야 하였다. 그도 무리를 따라 두 번을 갔다. 그대는 찰원(察院) 관아가 얼마나 엄숙한지 아는가 - 이런 작은 관리들이 말 한마디 꺼낼 틈이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일이 그러하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흘을 연이어 가서 인사를 마치자 여러 관리가 모두 나왔다. 일상은 이미 몸을 돌려 나가는데, 홀연 안에서 요 지사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일상은 무슨 일인지 몰라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이곳에서 벼슬하며 한 가지도 공정하지 않고 법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고, 한 털끝만큼의 불공정하고 불법한 돈을 취한 적이 없으니, 별다른 관계가 없을 것이라, 들어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에 황급히 달려 들어가 뵈었다. 찰원이 물었다: "그대가 상해 요일상인가?" 대답하였다: "소관이 바로 그러합니다." 또 물었다: "부임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대답하였다: "부임한 지 열 달이 되었습니다." 또 사옥사 일을 겸관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물었다. 대답하였다: "겨우 다섯 달이 됩니다." 찰원이 또 말하였다: "그대는 풍류 있고 호방한 사람인데, 어찌 이런 작은 관직을 맡고 있는가?" 일상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의아하여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대답하였다: "감히 그런 말씀을." 찰원이 또 말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 남경 우화대에서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신 것이 그대인가?" 일상은 이 두 마디 말을 듣고 무슨 연고인지 몰라 마음이 쿵쿵 뛰며 허둥지둥하였다. 마치 한 대야의 찬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듯 온몸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즉시 사모(紗帽)를 벗고 마늘을 찧듯 머리를 조아리며 입으로는 다만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나리의 용서를 빕니다"라 하였다. 찰원이 웃으며 말하였다: "황당해 하지 말라. 내 그대에게 먼저 물으리니, 그대가 우화대에 있을 때 수재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여 낙백(落魄)하여 그대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대가 그에게 의복과 은자를 주었으니, 그런 일이 있었는가?" 일상은 이에 마음이 다소 안정되어 연이어 응답하였다: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찰원이 말하였다: "그대는 아직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가?" 대답하였다: "한때 우연히 만났으나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되어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찰원이 또 말하였다: "그대는 일찍이 그의 성명을 알았는가?" 또 대답하였다: "소관이 우연히 도움을 드렸을 뿐, 성명은 묻지 않았습니다." 찰원이 말하였다: "바로 본원(本院)이 그 사람이오." 이에 말하였다: "일어나서 읍하시오." 한편으로 노복에게 문을 닫게 하였다.
일상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일어나 읍하고 옆에 섰다. 찰원의 체통으로는, 일반적인 작은 삼사(三司)와 부경력(府經歷), 현승(縣丞) 등의 관리에게는 차를 남기는 예가 없었으니; 특례로 차를 남기더라도 서서 마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군이 비록 찰원에게 옛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서서 차를 마실 뿐이었다. 차를 마치자 찰원이 말하였다: "본원은 그대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간 이래로,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항상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다행히 이곳에서 다시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기회를 빌려준 것입니다. 다만 지위의 높낮이가 너무 달라 체통이 엄격하여 왕래하여 보답하기가 불편합니다. 그대는 남을 구제하는 마음이 있으니, 옥중의 사정을 반드시 자세히 알 것입니다. 그 중에 만약 진정으로 억울한 이로 불쌍히 여길 만한 이가 있다면, 그대는 몇 사람의 이름을 써 오시오. 사람마다 천 금을 얻더라도, 본원이 마땅히 석방하여 그대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일상은 명을 받들고 차를 마신 데 감사하며 나왔다.
관아 안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몸을 움츠려 무슨 연고로 차 대접을 받았는지 알아보려 하였고, 부현(府縣)간에 일일 보고를 받아보는 이들이 즉시 이 일을 양사(兩司)의 각 도부현(道府縣) 관원에게 보고하였다. 부현 관원들 중에는 명함을 보내는 이도 있고 예물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대는 이들이 사옥사를 받드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모두 찰원의 지인을 받드는 것이었다. 요군이 관아로 돌아오자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즉시 관아의 서리(書吏)들을 불러 찰원의 말을 하나하나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서리들이 모두 축하하며 말하였다: "나리 축하드립니다, 이 한 가지로 큰돈을 버셨습니다." 요군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만약 내가 돈을 원한다면, 어찌 평소에도 돈을 긁어 몇 푼씩 벌지 않겠는가? 나는 오직 관직이 낮고 지위가 작아 억울함을 신원할 수 없어 매양 한스러웠을 뿐이다. 지금 다행히 상관께서 이런 좋은 뜻을 가지셨으니, 나는 바람을 빌려 불을 끄듯 이 오랜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거늘, 어찌 돈을 얻는 것을 기쁨으로 삼겠는가! 만약 돈을 원한다면, 돈이 없는 억울한 이는 결국 풀려나지 못할 것이다." 서리들은 이 말을 듣고 입으로는 칭찬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모두 비웃으며 생각하였다: '어디 돈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남들 앞에서 결백한 척하는 말이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기다려 보면 명백하게 드러나리라.' 이에 말하였다: "나리께서 돈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나리는 옥중에 진정한 억울함이 몇 명이나 있는지 아십니까?" 요군이 말하였다: "내가 부임하자마자 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물어 살피니, 옥에 일곱 사람의 진짜 억울한 이가 있다." 즉시 일곱 사람의 이름과 사연을 헤아려 늘어놓았다. 또 말하였다: "그대들은 전후 경위를 자세히 적어 문서를 만들어 석방을 청하라, 나는 스스로 한 푼도 받지 않겠다. 그 중에 부유한 집안 서너 명은 낼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그들에게 한 사람당 일이십 냥씩 받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옥의 서리들이 즉시 감방으로 가서 그 일곱 사람에게 말하였다. 일곱 사람은 감사함을 이루 말할 수 없어 즉시 집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고 은자를 모아 서리들에게 주었다.
그 서리들이 또 계산하여 말하였다: "본관이 비록 은자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어디 진심이겠는가? 더욱이 그가 이미 서너 명이 부유한 집안임을 알고, 찰원 나리도 한 사람당 천 금을 받으라 하셨으니, 차라리 그들 몇에게 이삼천 냥을 모아 여기 두게 하고, 문서를 그에게 보내기를 기다려 보자. 그가 진정 받지 않으면 반드시 즉시 문서를 올려 보낼 것이고; 만약 거짓으로 받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틀을 미룰 것이니, 그때 들여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계획을 정하고 은자도 이미 모아 두었다. 며칠이 지나 문안(文案)이 이루어져 서리들이 요군에게 보내 보여 주었다. 문안을 받아 즉시 황급히 찰원에게 가서 뵈었다.
그때서야 서리들은 그가 진정 돈을 받지 않음을 알고 사람마다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찰원 앞에 이르러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전달하여 불려 들어갔으니, 이번에는 앞서 뵌 체통이 아니었다. 일상이 들어가자 찰원이 문을 닫으라 하였다. 일상이 문서를 올리며 아뢰었다: "지사(知事)가 평소에 옥중 실정을 살피온 바, 그 중 사형에 해당하는 죄수 중에 일곱 사람이 실로 억울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사옵기에, 나리의 분부를 받들어 감히 뻔뻔스럽게 개진하오니, 바라옵건대 나리께서 하늘과 땅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찰원이 문서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무언가 얻은 것이 있는가?" 대답하였다: "석방하는 날을 이미 약정하였으니, 지사에게 합하여 칠천 금을 사례하기로 하였습니다." 찰원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대의 덕에 보답하기에 충분하도다. 그대는 이 은자를 갖고 귀가하여 편안히 지내고, 林泉 사이에서 소요하면 될 것이니, 어찌 오두미(五斗米)를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하겠는가?" 일상은 명을 받들고 나왔다. 찰원이 즉시 문서를 비준하고 일곱 사람이 즉시 석방되었다. 일곱 집안의 가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어 향을 피우며 무릎으로 기어 눈물을 흘리며 관아에 와서 감사를 드렸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요군이 찰원에게 이미 칠천을 얻었다고 말하였으나, 사실 한 푼도 얻지 못하였다. 남이라면 은자 몇 푼을 얻어 그 억울함을 신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더라도 부유한 자에게 은자를 받고 가난한 자는 무료로 해 주는 것도 현인 군자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높은 것은, 은자를 얻지 않더라도 반드시 상관에게 분명히 밝혀 자신의 진실한 신원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은 더욱 따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요군은 은자를 얻지 않고도 칠천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누가 이처럼 헛된 명성을 자처하고 실제 이익을 버리며, 남의 억울함을 신원하면서도 남의 재물을 이용하지 않고, 또 자신의 명예를 상관에게 구하지 않겠는가. 어찌 대성인(大聖人), 대보살(大菩薩)의 심장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은 고금에 많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요군은 즉시 문서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찰원은 그가 실로 칠천 금을 얻었다 여기고 즉시 문서를 준하여, 관(冠)을 걸고 귀향하니 이로써 온 성이 들썩였다. 사도(司道), 부현(府縣)의 누구도 경중치 않는 이 없이 말하였다: "이처럼 작은 관직에서 뇌물을 받지 않고 억울함을 신원하니, 실로 사헌(司憲), 찰뉴(憲臬)도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이에 모두 후하게 전별 선물을 보내어 우대하며 귀향시켰다. 일곱 사람의 집안이 친우들을 모아 삼원(三院)에 나아가 글을 올려, 억울한 옥사를 신원하고 한 푼도 받지 않은 성대한 덕과 맑은 기풍이 세상의 표본이 될 만하니 마땅히 명환사(名宦祠)에 넣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찰원은 처음에 그가 치사하도록 준허하면서, 칠천 냥을 이미 실로 얻었으니 귀향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삼학(三學)의 공적 상소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은자를 받지 않고 진심으로 억울함을 풀어주었음을 알고 크게 경이로워하며 말하였다: "이처럼 훌륭한 사람은 진실로 천하에 하나밖에 없도다! 다만 나는 본래 그에게 보답하려 하여 귀향하게 하였는데, 뜻밖에도 오히려 내가 그의 전도를 그르쳤도다." 즉시 비준하여 명환사에 넣도록 하였다. 독자여, 그대는 지사가 명환사에 들어가는 것이 예로부터 몇이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이미 덕을 쌓은 보답이었다.
귀향하여 집에 이르니 두 소매에 바람만 가득하였다. 손자는 비록 반(泮)에 입학하였으나 가업은 도리어 쓸쓸하였다. 집안 대소(大小)가 그를 많이 원망하며 셈을 모른다 하였으니, 이미 은자를 벌지도 못하고 작은 관직마저 잃었으니 밑지는 일이 아니냐 하였다. 요군은 태연할 뿐이었다.
나이 구십여 세에 이르러 홀연히 하루는 꿈에 오륙 명의 사람이 청의(靑衣)에 검은 모자를 쓰고 앞에 꿇어 아뢰었다: "저희들이 나리를 모시러 왔나이다." 요군은 꿈속에서도 전에 그가 구해 준 사람들임을 알아보았다. 이에 물었다: "그대들은 어찌 이곳에 왔는가?" 그 사람들이 말하였다: "저희들이 나리의 은혜로 목숨을 건져 집에 돌아가, 일곱 집안의 조상과 부모가 모두 천제(天帝)께 청하였나이다. 천제께서 사명진군(司命眞君)에게 명하시어 나리의 수명을 늘이시고, 또 나리의 자손이 대대로 현달하게 하셨나이다. 지금 나리의 수명이 다하려 하시매, 저희들이 나리를 모시러 앞에 왔나이다. 밖에 가마가 있사오니 나리께서는 바로 떠나소서." 요군이 듣고 즉시 가마에 올랐다. 여러 사람이 들어 한 관아 앞에 이르러 가마를 내렸다. 문지기가 안으로 보고하자 안에서 한 관원이 나와 맞이하였다. 요군이 자세히 보니 관부(官府) 차림이 아니라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어, 비로소 깨달았다: '염라왕이구나.' 염라왕이 요군과 읍하고 함께 대청으로 들어갔다. 먼저 한 높은 관원이 거기 앉아 있었다. 염라왕이 요군에게 그 높은 관원보다 윗자리에 앉도록 읍하였다. 요군이 사양하며 앉으려 하지 않았다. 염라왕이 말하였다: "그대는 황승사(黃承事)가 범문정공(范文正公) 위에 앉은 일을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덕을 논하는 것이지 지위를 논하는 것이 아니오." 요군이 이에 위에 앉았다. 염라왕이 말하였다: "그대에게는 음덕이 있소. 어제 천부(天符)의 칙명이 내려와 그대를 태산(泰山)의 형조(刑曹)로 청하였소. 그대는 귀가하여 후사를 정리하시오. 머잖아 모시러 올 것이오." 이에 배웅하여 보냈다. 여러 사람이 다시 들어 돌아왔다. 요군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아마도 죽을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평소 내가 집안 살림을 모른다고 원망하였으나, 어젯밤 꿈에서 전에 억울한 옥사에서 구해 준 사람들이 와서 맞이하며, 이미 천제께 청하여 내 자손이 현달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의 손자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우리 집안을 일으킬 자가 이 아이일 것이다. 그대들은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꿈속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였다: "염라왕이 나에게 머잖아 모시러 오겠다 하였으니, 반드시 죽을 때가 가까웠다. 그대들은 탕물을 준비하여 나를 목욕시키고 기다리라." 가족이 그 말대로 탕물을 준비하였다. 요군이 목욕을 마치고 또 말하였다: "나를 맞이하는 이들이 이미 문 앞에 있도다." 온 가족이 이상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함을 느꼈고, 잠깐 사이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손자 이름은 영제(永濟)로, 만력(萬曆) 무술년(戊戌年) 진사(進士)에 올랐고, 후에 관직이 절강(浙江) 좌포정(左布政)에 이르렀다가 예고(預告)를 받고 귀향하였다. 구름 같은 후손들이 모두 성덕(盛德)이 있어 세업(世業)을 빛내었으니, 簪纓의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곱 사람이 천제께 청한 말이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았다. 은밀히 덕을 행하면 밝게 드러나 보답을 받으니, 확실히 증험이 있도다. 권세를 쥔 군자여, 어찌 널리 방편을 베풀어 자손에게 훌륭한 도모를 남기지 않겠는가? 시에 이르기를:
들었노라, 덕을 쌓음이 부도(浮圖) 짓는 것보다 낫다 하니, 하물며 부도를 지어도 책에 다 기록하기 어려움이랴.
몇 층만 쌓아도 이미 사십구 층이요, 공을 쌓으면 마땅히 백 천에 준해야 하리라.
진실로 자손에게 물려줄 골짜기가 있다 칭하거니, 어찌 높은 문에 창을 세우지 않겠는가.
길에서 권세 잡은 여러 달인들에게 부쳐 말하노니, 부디 붉은 붓을 들어 갓끈을 바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