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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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건곤이 정해지다

천군의 명령은 성화처럼 다급하여, 항서는 서둘러 올려야 했고 공주 또한 항서와 함께 즉시 천정으로 보내져야 했다. 측비를 들이는 일은 본디 정비를 맞이하는 예만큼 성대하지 않아, 반드시 천군을 직접 알현할 필요는 없었고, 그저 대황자와 함께 황천후토께 절을 올리고 나면 자택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항서까지 함께 바쳐야 했으므로, 천군이 친히 능소보전에 임하여 그곳에서 합목달을 접견하였다. 합목달은 아수라왕을 대신하여 천정에 사신으로 와서 항서를 올렸다. 아수라왕은 왕후가 부상으로 아직 몸조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황자 합목달을 전권대표로 파견하였고, 아누는 그 뒤에 서서 자연과 나란히 섰으며, 양옆으로는 조정 대신들이 줄지어 늘어서 이 항복과 측비 책봉 의식을 함께 지켜보았다.

자연은 오늘 화려한 혼복을 한 벌 차려입었으니, 평소 보던 것과 같은 소박한 차림과는 달랐다. 온화하고 청아한 옥관과 옥잠을 벗고, 웅대하고 화려한 금관과 금잠으로 갈아 썼으니, 대황자다운 존귀한 기품이 한층 더 드러났다. 금실로 은은한 무늬를 놓은 비단이 금색, 붉은색, 청색이 어우러진 나포 위로 어렴풋이 비쳐 났고, 허리에는 자수금인을 둘렀으며 그 밖에 옥규 하나를 찼으니, 이 둘이 어우러져 그가 대황자로서 조정을 다스리는 위엄의 상징이 되었다.

어쩌면 평소였다면 이토록 옥수와 같이 빼어나고 위엄 넘치는 자연의 모습을 보고 아누는 절로 한없이 마음이 설렜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굴욕과 분노만이 가득했다. 이 느닷없이 닥쳐온 다급하고 빠른 천군의 조령은 아수라 왕정마저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본디 세 아들이 천정에서 전사했다는 흉보는 숨기려 했으나, 이 천군의 조령으로 인해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거기에 더해 아누를 대황자의 후궁에 측비로 보내야 한다는 소식까지 겹쳤다. 아버지는 노발대발 격노하였고,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어머니는 몇 번이나 울다 정신을 잃었으며, 다행히 할아버지의 신묘한 의술 덕분에 겨우 어머니의 기식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연이 미웠고, 자신이 입고 있는 이 붉은빛과 금빛이 뒤섞이고 자락이 길게 끌리는 혼복이 미웠으며, 머리 가득 꽂힌 구슬 비녀와 보요, 비취 고리와 화려한 빗도 미웠다. 그리고 금빛 계단 위에 위풍당당하게 높이 서 있는 천군은 더더욱 미웠다……

그녀는 물론 소이가 아니었다. 소이는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었기에 이미 자연의 고육지책을 헤아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가장 유연한 자세와 가장 굳센 기백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천군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누는 당사자였다. 미혹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아수라 왕정 전체가 들끓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더욱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본디 어머니를 닮아 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자태를 지녔지만, 그 성정만은 어머니를 닮지 않고 완전히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다. 게다가 나이 어리고 혈기왕성하니, 이 마당에 앞뒤 사정을 가릴 겨를이 어디 있으랴. 지금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온 가족을 망친 저 천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홀몸이었다. 설령 합목달을 더해도 겨우 두 사람뿐이었으니, 지금 양옆에 늘어선 조정 대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그 자리에 자연 한 사람만 있다 해도 그녀가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한 번 낭패를 당하고서야 한 번 철이 든 그녀였으니, 다시는 예전처럼 무모하게 천군에게 손을 쓸 수는 없었다. 그리했다가는 반드시 다 된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속으로, 천군과 함께 스러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은밀히 결심했다.

만약 그녀가 이토록 원한과 억울함을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신랑이 되어야 할 자연에게서 한 톨의 기쁜 기색도 없이 오히려 미간에 은은히 근심이 서려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떤 일은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라, 와야 할 일은 피할 수 없고 구해서는 안 될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마침 합목달이 앞으로 나아가 항서를 낭독하려는 순간, 뭇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그때, 아누는 건비를 뽑아 들어 사납게 자신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고, 곤비 또한 조금의 사정도 없이 천군의 심장에 대응하는 자리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뭇사람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한 사이 놀란 외침이 여기저기서 어지러이 터져 나왔는데, 그 순간 자연이 큰 손을 한 번 휘두르며 두텁고 순후한 법력을 남김없이 쏟아 내어, 막 천군의 가슴을 찌르려던 곤비를 억지로 방향을 돌려 자신의 가슴에 꽂아 넣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건비가 나온 이상, 곤비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직 자신의 몸으로 대신 목숨을 바쳐야만 부군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자연…… 안 돼요……" 곤비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것을 목격한 아누는 놀라 외쳤지만, 이때 그녀 또한 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스르르 쓰러진 채 숨이 곧 넘어갈 듯 위태로웠다. 이것은 그녀가 원한 국면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연에게 화가 나 있었다 해도, 그녀는 결코 자연이 함께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에게는 무엇도 돌이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그녀 자신조차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아누……"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진 소란을 알아챈 합목달은 항서를 내던지고 바닥에 쓰러진 아누에게 나는 듯 달려가, 울면서 그녀를 부축해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가?

합목달이 몸을 돌리는 것을 본 자연은 즉시 세 사람과 뭇사람들 사이에 결계 하나를 펼쳐,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 하는 한편 곤비의 자루를 다시금 꽉 그러쥐었다. 이 건곤비는 평범한 비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누가 천지현황과 음양의 변화에 응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기에, 주인의 뜻에 따라 천변만화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으며 셋이 만물을 낳을 수도 있었다. 자연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용어검의 태극검혼과 같은 이치를 지녔으며, 게다가 음양 한 쌍의 비수인 만큼 수행을 건네는 속도는 더욱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자연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깊이 깨닫고, 아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버티지 못하기 전에 온몸의 수행을 가장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건네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온몸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자신의 두텁고 순후한 수행을 남김없이 곤비를 통해 아누에게로 흩뿌려 보냈다.

천군과 뭇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하나같이 놀라 앞다투어 술법을 펼쳐 자연이 펼친 결계를 풀려 했지만, 자연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가 버티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모두들 어서 손을 멈추세요! 대전하께서는 지금 육신으로 결계를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풀려 하면 할수록 그분은 더욱 고통스러워지십니다……" 뭇사람들 가운데 신육이 가장 먼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채고 큰 소리로 외쳤다.

뭇사람들은 다시 놀라 앞다투어 손을 멈추었지만, 애가 타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연…… 안 돼요……" 아누의 힘없는 목소리가 온 얼굴 가득한 눈물 자국과 함께 한마디 한마디 자연을 말리려 했지만, 자연은 이미 마음을 굳혀 조금도 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자연아, 어서 결계를 풀어라……" 천군이 몸을 일으키려다 뜻밖에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금빛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뭇 신하들은 다시 한바탕 소란에 휩싸였다. 누군가는 천군을 부르고 누군가는 대전하를 불렀으니, 능소보전은 한순간 초조함과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자연아…… 내 아들아…… 어서 결계를 풀어라! 아비가 잘못했다…… 아비가 너와 화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천군은 이 순간 온통 뒤늦은 후회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는 아들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알고 보니 자연이 계산에 넣은 것은 이 아비인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그 계산 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 어리석은 아비는 한순간의 노기에 이성이 가려져, 그 빈틈없이 계략을 짜는 아들의 꾀가 결코 거기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만약 이 아비의 작은 속셈이 뜻대로 이루어지게 두었더라면, 그가 어찌 자연일 수 있으랴?

아무리 많은 후회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천군은 이미 늙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 갈수록 창백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자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그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전하……" 합목달은 자연을 바라보다 다시 아누를 바라보았다. 이런 광경 앞에서 그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연은 지금 자신의 목숨으로 아누의 목숨과 바꾸고 있었으니, 만약 이를 막는다면 아누는 한 가닥 살길조차 잃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대전하 자연이 자신의 수행을 남김없이 건네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 또한 그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막든 막지 않든, 그는 어느 쪽이든 잘못이었다.

아누가 울자, 그도 함께 울었다.

"합목달……" 한참 만에 귓가에 자연의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데……데려……가…… 아…… 누를…… 데려가…… 모…… 모로께……"

힘없고 미약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연은 비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힘겹게 아누를 한 번 바라본 뒤, 그는 두 눈을 감았고, 이내 숨이 끊어졌다.

"안 돼요……" 아누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켜 기어가려 했지만, 마음만 있을 뿐 힘이 따라 주지 않아 안간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합목달이 그녀를 안은 채 조금씩 몸을 움직여 겨우 자연의 손에 닿게 해 주었지만, 뜻밖에도 자연의 육신은 순식간에 점점이 반짝이는 빛으로 변하더니, 능소보전 밖을 향해 하늘하늘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전각 안에서는 자연의 혼백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곤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그가 육신으로 펼쳤던 결계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합목달은 마음속으로 비통했지만 감히 더 지체하지 못하고, 아누를 안아 든 채 곧장 아수라 왕정을 향해 내달렸다.

"자연아…… 자연아…… 내 아들아……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천군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목이 쉬도록 통곡하며 후회와 원통함에 몸부림쳤다. 뭇 신하들은 저마다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통곡했고, 입으로는 "대전하"를 나직이 되뇌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금빛으로 반짝이는 서신 한 통이 천군의 눈앞에 펼쳐졌다.

"불효자 자연이 삼가 부군께 자비를 베푸시어 아누와 아수라족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아내의 허물은 지아비가 갚는 법, 자연이 이미 아내를 대신하여 그 허물을 갚았사오니, 부군께서는 아수라족과의 은원을 모두 잊으시고 진심으로 화해의 손을 맞잡아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어느 한쪽만 굴욕을 당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시어, 훗날 또 다른 원통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소자가 평생토록 바란 것은 오직 삼계가 태평하고 세상이 평안한 것뿐이었으며, 부군께서 소자를 아끼시던 그 마음을 부디 삼계의 뭇 생명을 두루 아끼시는 마음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삼계가 평온하면 소자 또한 함께 평안할 것이옵니다. 앞으로 소자는 더 이상 부군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여쭐 수 없을 것이니, 부군께서는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소자 자연, 머리 숙여 하직 인사를 올리옵니다."

이는 자연이 미리 써 둔 편지였다. 그는 일찍이 이런 결말을 예견하고 있었으니, 이 편지는 다름 아닌 그의 유서이자 그의 마지막 소원을 담은 것이었다. 그 아들은 어찌하여 부자간의 정과 부부간의 정, 그리고 삼계의 대의를 모두 온전히 하면서도, 유독 자기 자신만은 잊어버린 것일까?

천군은 슬픔과 애통함이 극에 달해 가슴이 막히고 숨이 차올라, 그대로 능소보전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